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휘는 방원(芳遠),[26] 자는 유덕(遺德).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1398년(태조 6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모인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과 그 친형인 무안군,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일파를 모두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고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2. 묘호와 시호[편집] "고애자(孤哀子) 사왕(嗣王) 신(臣) 【휘(諱).】[27]는 삼가 재배(再拜) 돈수(頓首)하고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큰 덕(德)과 높은 공(功)은 전고(前古)에 뛰어나니 큰 이름을 시책(謚冊)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휘호(徽號)를 올립니다. 공손(恭遜)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께서는 총명(聰明)하고 신성(神聖)하며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다한 때를 당하여 천심(天心)의 돌아가는 바를 알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비로소 개척(開拓)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고황제(高皇帝) 를 뵈올 때 세 번이나 접견(接見)하는 총영(寵榮)을 받았습니다. 일이 기미(幾微)[28]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적에 환하게 알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길이 평안(平安)하게 하였습니다. 천부(天賦)의 사랑이 오직 어버이에게 깊어 승안(承顔)[29]의 효(孝)에 지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우애(優愛)하여 이에 양덕(讓德) 의 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무위(武威)는 바람과 우레보다 엄숙(嚴肅)하고 문치(文治)는 해와 달보다 밝았습니다. 교린(交隣)하는 데 도(道)가 있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精誠)으로 하니, 덕화(德化)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흡족하여 은혜가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외람되게 큰 왕통(大王統)을 이어받은 것을 생각하여 나이가 오래되시도록 영화롭게 봉양(奉量)하리라 기약하였더니, 어찌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이에 말명(末命)[30]을 남기십니까? 울부짖고 통곡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이에 현양(顯揚, 이름과 지위를 세상 높이 드높이는 일)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謚)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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